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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세상이야기

중,일 학자들이 본 이순신 장군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610563



[스크롤 압박이지만 가능한 끝까지 읽어주시길...]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사관학교(육사.해사) 장교 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이죠.

이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

-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 1500~1600년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입니다.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님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님 탄생 때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때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 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존경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장수였던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것이다..

더군다나 그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 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수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맡은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나, 1990년에 이순신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다 이순신 장군의

 

행적에 감화를 받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받아 1995년

동북공정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7. 이순신 장군의 혁명 가능성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

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님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훗날 청나라)을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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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권율이 나의 초가를 찾았다. 나의 함대가 원균의 지휘하에 칠전량에서 전멸을 하였다는소식이었다. 권율은 '전멸' 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자네, 무언가 방도가 없는가?"

 

아! 나는 차라리 의금부의 형장 위에서 죽었기를 소원하였다. 조정은 나를 죽이려다 형세가 급해지니 나를 살렸고, 나는 방도가 없는 형세에서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권율이 다녀간 뒤로 임금의 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들었다. 칠전량의 패전이 매우 심각하였나 보다. 교서는 장중하면서도 교태로운 언사들로 넘쳐났다.

 

“왕은 이르노라. 어허, 국가가 의지할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흉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움에 모두 잃었으니 누가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을 지켜주리오.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리오…”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부하를 어루만지고 도망간 자들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의 위엄을 떨치게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군율을 범하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그대의 지휘로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감은 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이제 수군은 함선도 없이 외로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에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 본 바, 그대는 수군을 폐하고 신속히 북상하여 도원수와 명나라 천군들과 합하여 지상전을 펼치라."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하지만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육지에서 싸워야 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나는 붓을 들어  한 줄을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이제 수군을 폐하시면, 전하의 적들은 서해를 따라 충청해안을 거쳐서 한강으로 들어가 전하에게로 갈것임으로, 신은 멀리서 이것을 염려하는 바입니다. 수군이 비록 되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척이 있사온즉...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에서 승리한 지 어느정도가 지난날 밤, 조정으로 부터 당도한 사신이 전하로부터의 하사품을 전달하였다. 상자 안에는 서찰 한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서찰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단 두글자가 적혀있었다.

"免死" 죄가 없다고 하는것도 아니요, 잘못을 용서해주겠다는 것도 아닌 단지 죽음은 면해주겠다는 말. 나는 한동안 말없이 그 면사첩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한 의병장 김덕령은 도리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한달동안 무려 6번이나 국문을 받았다. 결국 용맹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고문아래 죽었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홍의장군이라 불리우던 곽재우 역시 같이 문초를 받다가 불구가 되어 의병을 해산시키고 산중에 칩거하였다. 임금에게 있어 하찮은 백성들이 감히 나라를 지키겠다며 일으키는 의병따위는 매우 불길하고 흉흉한 존제였다. 패전을 거듭하거나 부하들을 뒤로한체 도망한 장수들은 용서를 받고, 출전을 회피하는 명나라 장수들은 여전히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나, 연승을 거두는 장수나 의병장들은 어김없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임금은 그렇게 자신의 잠재적인 적을 죽임으로써, 멀리서 임금의 칼을 휘두름으로써 자신의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고싶지는 않았다. 나의 죽음은 전장 저 멀리, 임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나는 붓을 들어 면사첩에 대한 답을 적었다.

 

"전하, 전하의 적들이 전하를 뵙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신은 결단코 전하의 적들을 전하에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적들은 전하의 적이 아니라 신의 적인 까닭입니다"


백성들은 무수히 죽어나갔다. 백성들의 적은 왜적들 뿐이아니었다. 명나라 병사들 역시 앞다투어 조선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그 목을 베었다. 명나라군은 적의 수급으로 공을 가렸고, 왜군은 적의 코를 베어 그 숫자를 헤아렸다. 왜장들도, 명나라 장수들 역시 공을 다투고 있었다. 백성들을 죽여 그 목과 코로 적군을 가장하는 일이 비일비제하였다. 조선의 백성들은 단지 어깨위에 머리와 코가 달린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노량의 물결은 사나웠다. 치솟는 물기둥의 허리를 바람이 베고 지나갔다. 적들은 바다를 뒤덮고 달려들었다. 검은 깃발의 선단이 서쪽 수평선을 넘어왔다. 물보라에 뒤덮여, 적선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광양만을 떠난 순천의 적들이었다. 적들은 노량 수로를 향하고 있다. 쇠나팔을 불어서 함대를 뒤로 물렸다.

 


적들은 경건해 보였다. 적이 경건했다기보다는, 적이야말로, 그 앞에서 내가 경건해야 할 신비처럼 보였다. 신비, 신비라고나 해두자.

 

적들이 파도를 타고 밀려올 때면 나는 항상 기진했다. 충만한 적들이 살기는 바람을 타고 달려들었다.

적들은 나의 칼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나는 나의 칼이 벨수 없는 적은 상대할 수 없었다...

바다는 너무 넓었고, 적 또한 헤라릴 수 없이 많았다.

 

나는 대장선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빌었다. 무엇을 향해 빌었는지, 나는 빌고 있었다. 바다는 문득 고요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불붙은 적선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노를 저어와서 내 대장선의 고물을 들이받고 깨어졌다. 적병들의 시체가 노와 노 사이에 끼어 으깨졌다. 물에 뜬 적병들의 시체를 헤치면서 또 다른 적선이 불길을 날리며 달려와 대장선을 들이받고 깨어졌다. 적들은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관음포가 급하다. 관음포로 가자.”

 

난간에 도열한 적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쏘아댔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북을… 계속… 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송희립은 갑옷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북을 울렸다.

 

난전은 계속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 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적선을 태우는 불길이 바다 곳곳에서 일었다. 등판으로 배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격군들은 관음포를 향해 저어가고 있었다.

 

싸움터를 빠져나가 먼바다로 달아나는 적선 몇 척이 선창 너머로 보였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와류 속에서 적병들의 시체가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적선의 파편들이 뱃전에 부딪혔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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